난징(南京)의 영욕
난징(南京)의 영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2.0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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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江蘇省) 성도인 난징은 면적이 4천500㎢에 이르고 500여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화중지역 거점도시이다. 난징시를 가로지르는 양자강이 우한(武漢)과 장강삼협(長江三峽) 등으로 수로를 열어주면서 전자, 기계, 특종 중공업 산업이 발달하였고, 전통적인 교육문화 중심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화상대회 개최를 계기로 난징은 급속도로 발전하며 다방면에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 중국의 국부, 손문의 시신이 안치된 중산릉.

뒤돌아보면 난징은 2천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5대 고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때인 229년 손권이 이곳에 도읍을 정해 오(吳)라고 칭하였고, 그 후 동진(東晋), 남송(南宋), 제(齊), 양(梁), 진(陳), 명(明) 왕조와 손문의 국민당 정부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니 그 전통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명 왕조 설립자인 주원장(朱元章)이 난징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건립했던 궁궐의 터와 그의 무덤인 명효릉(明孝陵)이 남아있으며, 능으로 통하는 석상로 양쪽에 배치된 16쌍의 석조 문신과 무장은 장관을 이룬다. 아울러 신해혁명을 일으켜 부패한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삼민주의를 기치로 한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던 중국의 국부 손문의 시신이 안치된 중산릉도 난징 자금산(紫金山) 남쪽 기슭에 있다. 묘를 감싸 안은 묘실과 기념관, 광장, 그리고 수많은 계단이 그의 묘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어준다.

난징에는 공자를 기리는 부자묘(夫子廟)도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는 바로 과거시험을 보던 공원(貢院)도 있다. 부자묘 내에서 대성전을 참배하는 중국인의 모습에서는 공자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심을 느낄 수 있고, 공원에 전시된 칸막이 시험장소와 커닝페이퍼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상황과 함께 커닝의 역사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 희생자 숫자 ‘300,000’가 새겨진 난징대학살 기념관.

이밖에 시 중심에 위치한 현무호(玄武湖)와 호수 속 작은 섬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6천772m 길이의 장강대교(長江大橋)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로와 철로 양용도로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이 다리는 중국 자체 기술로 완공했기 때문에 더더욱 난징 시민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난징은 근대화 이후 많은 곡절과 상흔을 간직한 한 맺힌 도시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1840년 아편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영국 간에 체결된 난징조약이 바로 이곳 난징 황포강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곳에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각종 불평등 조약들이 발효되면서, 중국 대륙은 서서히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후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일본 군국주의세력이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침입하면서 일주일간 30만명의 무고한 난징시민을 학살한다. 당시 난징시 중심을 흐르는 양자강은 피로 붉게 물들고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이 치욕적인 사건이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즉 우리에게 난징대학살로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시민들이 학살된 장소에 세워진 기념관 앞에는 당시의 희생자 숫자를 표시하는 ‘300,00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으려는 중국인들의 결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몇 년 전 중국계 미국인 여류작가가 난징의 참상과 실상을 알리는 책 <난징의 강간(Rape of Nanking)>을 출간하였다. 이후 미국과 일본 및 중국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난징대학살에 대한 진위 여부 논란이 일어났다. 사실 난징대학살은 사진과 동영상 등 물증과 희생자 가족 증언 등을 통해 볼 때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비정의 역사를 가리고 왜곡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격이다. 이에 대한 일본의 중국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최근 일고 있는 조어도 분규와 역사왜곡으로 인한 중일 간 갈등 해소와 향후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시급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이인택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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