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소(牛)
한국인과 소(牛)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7.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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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미 수입쇠고기’가 이번 주부터 검역을 끝내고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국민들의 ‘거리감’ 때문에 대형 매장에서는 아직 판매량이 소규모에 그치고 있지만 소비자와 근거리에 있는 일반 소매점에서는 제법 팔리는 모양이다.

협상단이 몇 번씩 미국을 방문하고 한국내의 촛불시위가 정치 쟁점화 지경에 이르렀지만 미국이 ‘쇠고기 수출’을 계속 고집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우(韓牛)가 외국산 쇠고기에 비해 값이 비싸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를 수출하면 시장 장악력이 뛰어날 것이란 계산에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 이유는 한국인의 쇠고기 선호 성향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는 쇠고기에 대한 미각이 가장 세분화 된 민족으로 한(韓)민족과 동 아프리카의 보디족을 들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영·미 사람들은 소 한 마리를 분해 해 최고 35분류로 해 먹고 일본은 15분류 밖에 나눠 먹지 못하는 반면에 보디족은 51분류, 한국인은 무려 120개 부위로 요리해 먹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생활이 어려운 한국인들이 일본 본토로 건너가 막노동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런 형편에 처한 그들이 쇠고기를 사먹는 일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 한 마리를 해체해서 살코기를 비롯한 일부 부위만 발라내고 내장이나 뼈는 몽땅 내다 버렸다. 한국인들이 버린 소 내장을 가져다 소금물로 씻고 솥뚜껑을 뒤집어 그 위에다 요리해 먹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들은 기겁을 했다. 소위 ‘곱창’맛을 몰랐다는 얘기다. “창자를 먹는 미개 민족”이라고 업신여기던 일본인들이 ‘곱창’맛을 알고 난 뒤부터는 내장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다. 버린 뼈다귀를 푹 고아 ‘구수한’맛을 우려내고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맞춘 뒤 파를 썰어 넣어 먹는 ‘곰탕’맛을 알고 일본인들은 우족(牛足)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쇠다리의 관절인 도가니까지 발라 내 즐겨먹는 것이 ‘도가니탕’이고 척추뼈 속에 든 등골까지 빼먹는 것이 한국인의 음식문화다.

지난번 광우병 파동에서 척추부위를 따지고 꼬리까지 문제 삼는 한국인들을 미국인들이 의아해 했다는 이야기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소의 모든 부위를 한국인들이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우리 주변에서도 있었다. 한국 전쟁 전후 울산 두서면 소재 신불산에 은거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민가에서 약탈해 간 농우(農牛)를 땅굴 속에서 요리해 먹었다. 산을 에워싸 포위하고 있던 경찰토벌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점을 노리고 있었지만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공비를 기습한 경찰대는 그들의 ‘소 껍질 냄비’에 혀를 내 둘렀다. 소 껍질을 벗겨 ‘가마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소껍질 냄비는 고기를 구울 때 연기가 나지 않는 장점이 있어 토벌대에 들킬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1950, 60년대 한국 농민이 곡식생산에 생계를 걸고 있었을 때 소는 집안 재산목록 1호 이기도 했다. 마구간에 매어 놓은 황소의 크기를 보고 그 집의 재산정도를 가늠하곤 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4, 5학년이 되면 아버지는 송아지를 사다 키우고 대학 입학시기가 되면 이를 내다 팔아 자식의 대학등록금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런 ‘귀중한’재산을 잃어버리면 전 집안 식구들이 찾아 나서는 장면이 글 속에서도 자주 등장 한다.

이렇게 우리 조상 때부터 남달리 소를 귀중하게 여겼던 이유는 농경민족의 경우(耕牛)로서 소중한 생산도구였기 때문이란 희귀설(稀貴設)이 설득력을 얻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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