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동네 주위를 걸어가다 보면 여러 모습이 목격된다. 건너편 건널목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이때는 어느 누구도 기다려야할 의무적인 시간이다. 기다리는 보행자는 다섯명. 잠시 후 파란불로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 중 남녀 네명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각선(?)으로 건너가 버린다. 필자만 기역자(ㄱ)로 바르게 건너고 있으니 내가 법을 어기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들은 분명 조금도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내’(忍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는 말로 그것과 비슷한 말에는 ‘수련, 수행, 자제, 억제, 자족, 극복, 내인, 내구, 감내’라는 말까지 나열돼 있다.
‘인내’의 대표적 예는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거’(安居)라는 수행제도인데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1년에 3개월간씩 두 차례다. 각각 ‘동안거’와 ‘하안거’라 해 산문 출입을 자제하고 ‘수행’에만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기(雨期)에 땅속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와 밟혀 죽을 수도 있어 돌아다니기 곤란했다. 그런 연유로 이 제도가 행해졌다 한다.
지난주에 너무 놀라운 일을 봤다. 시내에서 일을 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이다. 러시아워라 버스에는 승객들도 제법 있었다. 운전하는 기사는 보아하니 30세가 조금 지난 젊은 사람이다. 위험하게도 이어폰을 낀 채 상대와 계속 통화를 하는 거다. 개인생활에서부터 세상이야기까지 마치 종편TV의 패널이 말하듯 토론식 대화법이다. 장장 30분 동안을 대화하면서 운전하는데 정말 가관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귀가하는 승객들은 마지못해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운전기사는 최소한의 운전규칙이나 소양교육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종착역에 도착해서 하면 될 텐데 ‘인내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이 이 무서운 일을 펼치고 있는 거다.
한 가지 더 보태어 이야기하자. 어제는 오래간만에 생맥주를 파는 호프집에서 친구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재미나는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네 명의 손님이 긴장한 듯 자리에 앉아 있다. 한가한 사람이라 치부할지 모르지만, 옆자리의 술판에 저절로 관심이 가게 됐다.
상황인즉, 시간이 잠시 흐른 후 무슨 영문인지 화가 난 남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여가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언행이 마치 조폭이나 다름없다. 테이블 위에다 술잔을 빙빙 돌려가면서 상대를 향해 연거푸 말을 쏘아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모양새다.
다행히 착하게 순응하고 있는 상대는 어딜 보아도 손윗사람인 듯 그래도 점잖은 품위를 취하고 있다. 내구력이 강한지 그렇게 모진 말을 해도 참고 있는 것을 보니 상당한 감내의 소유자다. 아니 불당에서 몇 년 간 수양한 좌선훈련과 명상요법에 달인이 된 듯한 사람이다. 모질게 말을 하는 그 사람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반면, 거친 말을 자연스레 듣고 있는 인내의 소유자는 훌륭한 비폭력자 ‘만델라’ 같다. 누가 승리자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을 테다.
17세기 프랑스의 우화작가 ‘라퐁텐’은 ‘인내’하면서 시간을 생각하면 힘이나 노여움이 이루는 것 이상의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 속에 숨어 있는 ‘보물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