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소고(小考)
설날 소고(小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1.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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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란 고유 명칭이 자리 잡기까지 설은 여러 수난사를 거쳤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명절인 설을 없애기 위해 음력 설날을 구정(舊正)이라 하고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불렀다. 설 명절을 없애기 위해 구정 일주일 전부터 총독부가 전국 떡 방앗간 가동중지를 지시할 정도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단기(檀紀)를 사용하면서 다시 제 분위기를 찾긴 했으나 공식 휴일로 지정되진 못했다. 하지만 설날이 추석과 더불어 우리 고유 2대 명절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휴일로 지정돼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됐으나 ‘이중과세’ 문제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특히 당시 정부가 주요 정책을 수출주도에 맞추고 있었기에 신정에 하루 쉬고 구정엔 정상근무를 했다. 설날 아침에 황급히 차례를 지내고 서둘러 아침 출근을 하던 것이 당시의 모습이다.

그 후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음력 설날은 한 때 ‘민속의 날’이란 이상한 명칭을 얻기도 했다. 정부가 설날을 완전히 민속명절로 인정해 음력 1월1일을 전후해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1989년부터다.

설날 명칭이 수난을 겪었던 것만큼 설날 특유의 습속도 많이 사라졌다. 설 전날 밤에 대문을 활짝 열어두는 풍속이 있었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당시엔 밤새도록 대문을 열어뒀다. 자정 넘어서부터 시작되는 새해에 복이 집안으로 굴러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습속이었다. ‘설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 진다’는 어른들 말에 어린 것들은 밀려오는 졸음을 밤새도록 참아야 했다. 혹여 잠에 곯아떨어지면 여지없이 눈썹에 흰 밀가루가 칠해져 있었다. “복조리 들어갑니다”라고 외치면서 담 너머로 복조리를 던져 넣던 ‘복조리 꾼’도 추억의 한 장면을 메운다. 대나무를 얇게 쪼개 만든 조리는 밥쌀을 이는 데 사용하던 우리민족 고유의 도구다. 쌀이 부(富)의 척도였던 농경시절부터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이 넉넉해 삶이 풍요롭길 바랐던 우리네 습속에서 비롯된 도구였다.

설날 아침 여자애들은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이상한 풍속도 있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주(主)를 이루던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자애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여자애가 설날 점심 무렵까지 이웃집에 못 가도록 막는 것이 당시 어머니들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들을 서슴없이 걷어차는 요즘 여자애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세배를 하면 어른들이 주머니 가득 넣어주던 밤, 곶감이 지금은 만원짜리 지폐로 바뀌었고 윷놀이보다 화투를 즐기는 요즘에 설날의 변천사를 알아보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지만 갑오년 설날을 앞두고 설날의 수난사와 사라진 습속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음주부터 일부 기업들은 긴 설 연휴에 들어간다. 고향을 찾아 오가는 발길들이 분주할 것이다. 고향을 찾은 사람들에게 흔히 남는 게 속 쓰림과 술병이다. ‘설날’의 ‘설’은 몸을 사리다의 ‘사리다’ 즉 ‘조심하거나 경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가오는 설날엔 마음을 ‘사리고’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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