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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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7.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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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문예작품 경시대회서 두 편 당선

여유조차 없이 밤낮으로 생업·학업 몰두해

‘어릴 때부터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했던 소년이 문학에 눈을 뜨고 장르의 구별 없이 많은 책들을 탐독한 결과, 오늘 날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의 노도를 마주칠 때마다 거칠어지고 메말라가는 내 감정을 순화시키는 여과장치가 되었다.’

동강 선생은 중학생 시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의 모든 중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문예작품 경시 대회에 두 편의 시(詩)가 은상과 가작으로 당선되었다. 일본어로 된 시의 내용은 서정적이고 외로움을 이겨내는 노래이었다. 먼 훗날(1984)에도 집무실에서, ‘사람의 일생이 잡초나 다를 것이 없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잡초 한 송이처럼 가슴에 태양을 안고 살자.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를 부러워 할 것도 없이우주의 ‘사랑’을 믿으면서, 제 나름대로 태양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나가자’ 라고 메모를 남겨놓았다. 이처럼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밤이면 미 대사관으로 출근하여 야간 당직 겸 번역을 하면서 고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의과대학교 학생의 이런 생활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어떤 시골출신 학생들은 영어실력도 부족하고, 혼란기의 어려움 때문에 낮에는 학교에서 졸고, 밤에는 야경꾼(통행금지제도가 있어서 밤 11시 이후에는 사람들이 시내를 돌아다니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사람들 통행을 단속하는 사람)으로 잠자리와 밥 먹기를 해결하기도 했다.

‘미 대사관의 번역일은 학비를 충당하고도 생활의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일자리였다. 남들은 대학시절의 낭만과 자유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시기에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밤낮으로 생업과 학업에 몰두했지만 젊음이 있었기에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태양을 향해 살아가는 마음 다짐이 이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또한 미군정 시절의 번역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어로 각종 행정문서를 일본어를 거쳐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문학적 폭이 넓지 않고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우리말로 된 우리의 사정을 영어로 정확하게 영역하는 것은 더더욱 힘 드는 일이었다. 이것을 아무런 탈 없이, 특히 공산당 간첩 사건이 터져도 의과대학교 학생이라는 ‘예비 닥터’라는 전문성으로 인정을 받아, 번역 일과 당직을 해낼 수 있었다.

동강 선생뿐만 아니라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사각모(四角帽)를 쓰고 서울 거리를 활보할 때에는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 경성제국대학 대학생이었다. 모자를 헌 모자로 만들어 쓰기를 즐겨했고, 교복도 먼지투성이 낡은 교복으로 입고, 이것을 멋으로 알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동강 선생에게는 이런 낭만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해방 전부터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좌·우익으로 시국이 뒤숭숭 하였고 의과대학의 공부가 모두 암기 위주라서 갑갑하기만 했다.

대부분 이론에 치우친 교육이었다. 하여간 부모님께 기대지 않고 학자금을 해결하며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사람 된 도리(道理), 자식 된 도리를 챙기라는 재촉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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