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과 때늦은 에로티시즘
허니문과 때늦은 에로티시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2.29 1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런저런일과 구실을 붙여 지금까지 한 열 댓 번 쯤 제주도를 방문했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바다에 대한 눈물겨운 선천성 짝사랑 때문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비밀을 지닌 듯 신비스런 까만 돌은 무시로 나를 끌어당기곤 했던 것이다.

며칠 전 지나간 크리스마스이브는 내 생일날이기도 했다. 생일 기념으로 흔쾌히 제주도 여행을 결정한 것에는 억지춘향 느낌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흡족했다. 까짓 생일이 대수냐고 입버릇처럼 말 해왔지만, 은근히 챙겨주기를 바라는 기대는 해가 갈수록 더하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호들갑을 떨며 비행기 트랙을 오르는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의 섬들도 정감 있게 보였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첫 비행기를 타기위해 설친 새벽잠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려고 스르르 눈이 감겨 올 즈음 벌써 제주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우선 근처 식당을 찾아 늦은 아침을 먹었다. 무심코 시킨 성게미역국이 마침 생일 아침에 먹기 딱 어울리는 음식인 것 같아 손뼉을 쳤다. 속을 든든히 다스린 후 방향을 어디로 잡을까 고민했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실은 올레 길을 걷고 싶었지만, 추운 계절인지라 복장이랑 신발이 안 맞아 망설여졌다. 해서 랜트카에 비치돼 있는 관광책자를 넘기다가 ‘에코랜드 테마파크’와 ‘제주 러브랜드’로 방향을 정했다.

에코랜드의 꼬마열차를 타고 제주의 야생이 살아있는 숲속을 돌아보는 것도 의외로 실속 있었다. 역시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관광 상품을 많이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랜드에는 입구에서부터 민망한 포즈의 여자와 남자상이 즐비했다. 그 전 같았으면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괜히 딴 청을 하며 얼굴을 붉혔겠지만, 세월 따라 낯도 두꺼워졌는지 그냥 웃으며 볼 수 있어 마음도 편했다. 관람객 중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커플이 더 많았는데 의외로 덤덤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을 보니, 세련된 시대를 잘 타고난 그들이 약간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난 끝에는 물건을 파는 매장이 있었는데 지긋한 여주인의 은근한 부추김에 힘입어 생각지도 않게 약(?)도 한 병 샀다.

그리고 그 약은 사람의 마음을 희한하게 설레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축하 파티삼아 마신 한 잔의 포도주도 들뜬 기분에 한 몫을 했으리라. 때가 때인 만큼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려 호텔에 숙소를 정한 여행객들의 동작에서도 사뭇 들뜬 기운이 느껴졌다. 술렁이는 분위기에 편승한 여행지의 밤은 바야흐로 에로틱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낮에 본 장면들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어선지 말과 행동이 평소와는 다르게 과감해졌다. 젊은 사랑은 당연히 아름답지만 나이 든 사랑도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음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이의 여인들은, 특히 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아이보다 더 미숙한 어른으로 머물러 있는 부분도 많을 것 같았다.

창을 여니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시원하게 귓전을 적신다. 제주도는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만큼 신혼의 달콤함 못잖게 저무는 에로티시즘도 피어나는 곳임에 분명하다. 나이 핑계를 대며 귀차니즘에 절은 사람들은 모두 제주도로 가보자. 새로운 기운과 사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도 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숙제 한 가지를 해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전해선 수필가>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