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영예로운 마무리’ 될까요?”
“이 정도면 ‘영예로운 마무리’ 될까요?”
  • 정종식 기자
  • 승인 2013.12.2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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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대 중구 부구청장
물고기 다 떠나도 맑은 물로 남고 싶었던 공직 34년

이 보다 올곧은 공직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요직이란 요직은 다 거쳤지만 방 두 개 딸린 실 평수 18평짜리 아파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래서 그는 평소 자신이 원하던 대로 ‘영예롭게’ 퇴직한다. 중구청 부구청장 장광대(59·사진) 지방 부이사관. 장 부구청장은 26일을 끝으로 34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한다.

그는 1979년 토목 기술직 4급 을(현 7급) 공채로 경남 사천 군청에서 처음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25세 때다. 그는 초봉이 12만 9천원이었다고 정확히 기억한다. “당시 가죽점프 하나가 15만원 했습니다. 제 봉급으로 모자라 어머니가 보태 주신 돈으로 샀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요즘 공무원 처우는 급료·복지 등 모든 면에서 크게 개선됐다고 한다. “하루는 집 사람이 아침에 라면을 끓여 내 놓는 거예요.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쌀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기가 찹디다.” 요즘과 달리 그 때는 선배, 상사들의 점심, 술시중까지 들었다고 한다. 작은 봉급으로 이리 저리 떼우다 보면 집 돌보기는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는게 그의 회고다.

토목직 출신이어서 울산시 곳곳에서 거의 족적을 발견할 수 있다. 도로과장 시절 지금의 태화 로타리 하부 확장공사를 마감했다. 시청 신청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화는 그가 철저한 원칙주의자임을 말해 준다. “터 파기 흙 공사를 하는데 모 건설기계 노조 측에서 자신들의 덤프 트럭만 쓰라는 거예요. 못 한다고 했죠. 그렇게 되면 다른 덤프 트럭업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가 34년 공직 생활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는 건 평소 ‘나는 공직자다. 개인적인 사욕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늘 간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외부로부터 질시도 받고 비아냥 거림도 받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다. 광역시 건설교통국장, 종합건설본부장 등 소위 도시건설 최요직을 거치면서 지인, 동창들과 점점 멀어졌다. “건설 본부장을 하니까 뭐 좀 생기는게 있는 걸로 생각했던 모양이예요.” 그런 요구를 거절하자 그로부터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더란다. 어떤 사람은 “맑은 물에 고기 못 산다”며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잘 해 주는 건 한 순간이고 실수는 영원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몇 번씩이나 감사부서에서 근무하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감사부서에 가서 일일이 파 뒤 집으면 그나마 남은 동료, 친구들마져 잃을 것 같았습니다. 맑은 물을 만들려면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 부구청장은 2005년 울산종합운동장을 준공한 뒤부터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운동장 건설과정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생긴 급성백내장 때문이다. “10월에 울산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데 7월 1일자로 종합건설본부 시설부장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건설공사공정은 한참 뒤져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주야로 일했다. 밤잠을 설치다 보니 불면증도 찾아왔다. 9월 준공을 마친 뒤 긴장이 풀리자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이 따라 다니는지 일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KTX 역사 준공에 맞춰 배내골 도로확장 공사를 하느라 그는 또 한번 홍역을 치러야 했다. KTX가 울산을 통과하면 당장 영남 알프스 쪽으로 관광객이 몰릴 것이란 주장이 대두되자 배내골 도로를 더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산악지역 도로 확장은 평지(平地)도로를 확장하는 것보다 수십배 더 어렵다. 건설과정에서 발생할 지도 모르는 사고들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건설 책임자들 상당수는 소화기 계통이나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의 얼굴에서 평안함과 여유가 엿 보인다. 건설현장에서 시달리고 찌들었던 흔적은 별로 찾아 볼수 없다. “혹시 신부(神父)가 돼고 싶었던 적이 없었느냐”고 묻자 역시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만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요즘도 그는 거의 매일 하침 108배를 한단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불심을 자원봉사에서 찾는다. 어렵게 업주로부터 허락을 받아 양산 통도사 앞에 있는 온천 랜드에서 장애아들을 목욕시켜 주던 때를 회상했다. “목욕탕 주인들이 도대체 허락해 주질 않으려고 해요. 장애아들을 기피해서죠.” 겨우 한 업주로부터 허락을 받아 그것도 손님이 뜸한 아침 7~9시 사이에 애들을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머리를 감겨주던 한 아이의 눈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말은 못하지만 ‘다시 꼭 오라는 눈길’이었다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장 부구청장은 오랫동안 울산시청 공무원 불자회장을 맡았다.

그는 부모로부터 이런 봉사와 성실을 배웠다고 했다. 장 부구청장의 어머니는 1만시간 봉사해 금배지를 받았다. 부친은 47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상사에 대해 “떠난 뒤 오히려 더 잘해라”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난 상사들을 찾아 명절 때 세배를 올린다고 했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직장 상사들 쪽으로 흘렀다. 박맹우 시장의 ‘철저한 신뢰’를 잊지 못한고 했다. 그런 신뢰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낼 수 있었다고 했다. 현 직계 상사인 박성민 중구청장에 대해선 “나도 일 벌레란 소리를 들었지만 나 보다 몇 배 더하다. 추진력은 아마 따라 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하자 “윗사람이 경험과 공직철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요즘은 직장상사를 젊은 직원들이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다 평가 합니다.” 그러니까 상사들이 직원들을 격려하고 대우해 줘야 한다고 했다.

퇴임하면 시간이 없어 못 읽었던 책을 실컷 읽고 싶단다. 또 전국 축제를 모두 둘러보고 중구에 도움을 주고싶다고도 했다. 34년 공직생활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 집필도 계획 중이다. 부인 김미애 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글/사진=정종식·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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