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 유감
망년회 유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2.1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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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전환기가 돼야 잘못을 느끼고 마음을 가다듬는 습성이 있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각오를 새로이 다지고, 달이 바뀐 첫 날 계획은 실천 확률이 높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남에게 고통주는 일을 했거나 죄 짓는 일을 한 적이 있어 마음이 괴로울 때, 자신의 태만으로 일을 망쳤을 때, 인간은 ‘초 자아적인 인간정신’으로 접근하고자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해가 바뀔 때 이런 시도를 한번 해보는 것이 바로 ‘망년’이다.

이런 습속은 우리네 무속 신앙에서 일부 발견된다. 무속인이 당굿을 할 때 집 앞 고목이나 신목에 꽃바구니를 매달아 두는 습속이 있었다. 굿을 하는 동안 젊은 무녀를 그 꽃바구니에 태워 승천(昇天)시키는 의식을 갖는데 그 때 마을 사람들이 그 꽃바구니에 동전을 던져 하늘의 ‘용서’를 빌었다.

당굿이 끝난 후에도 꽃바구니를 매달았던 밧줄은 사철 내내 그 신목에 매달아 두고 죄 지은 사람들이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이 찾아와 그 줄을 잡아 당기게 했다. 그 줄을 ‘하늘의 신’과 통하는 ‘신명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음에 죄진 일이 있거나 양심의 가책 받는 일을 한 사람이 이 줄을 붙들고 참회하는 모습은 해가 바뀔 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망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프로이드는 신과 연결된 인간의 이런 양심을 ‘초자아’라 했는데 무속 신앙에서 나오는 ‘신명줄’도 바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초자아적인 연결매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망년회는 이와 비교할 때 많이 변질됐다.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각종 모임은 사람들을 거의 짓이겨 놓는다. 동창회, 향우회를 비롯한 무슨 무슨 모임은 사람을 거의 매일 밤마다 술독에 빠지게 하다가 막상 세밑이 되면 파김치가 돼 드러눕게 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모습이었다.

‘망년’이 이런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아님을 외국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 정교를 믿는 일부 러시아 지역에서는 연말에 가족이나 친지끼리 모여 한 해 동안의 잘못을 고백하면 면책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 도벽 있는 한 백작이 고백하는 장면은 익히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저녁 이반의 가정 음악회에 초대돼 갔지. 거실 책상위에 3루불 짜리 지폐가 있길래 슬쩍했지. 지폐가 없어진 것을 안 이반은 야단법석을 떨더니 일하는 아이 디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끝까지 시침을 뚝 떼고 있었지. 결국 그 고아 소녀는 한 밤중에 보따리를 들고 집에서 쫓겨 나갔어. 그날 이후 그 아이의 원망하는 눈초리가 밤마다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 고통은 3백만 루불 로도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인간이라면 누구든 한번 쯤 이런 양심의 가책을 품고 살지 않았을까. 그런데 다만 ‘신명줄’이 없어 잡아당기지 못했을 뿐 일 것이다. 2013년 한해가 저물어 간다. 인간이 살면서 어찌 일 년 동안 기쁜 일만 있었겠는가. 슬펐던 일, 괴로웠던 일을 망각의 재능으로 덮는 것도 삶의 일부분일 것이다.

어느 일본인이 필자에게 “한국 사람들은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사께(일본 술)’ 한두 잔 홀짝이는 걸로 망각할 수 있는 그네들과 달리 우리는 시달리는게 너무 많아 그렇다고 답한 적이 있다. 하지만 퍼 마신다고 모든 게 해결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 “술 마시는 우리가 차 마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했지 않은가.

요즘 술병이 날 정도로 저녁마다 마셔대는 풍조가 없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인간의 초자아’에 접근하기 위해 ‘신명 줄’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은 아직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아 유감스럽다. 이번 주 말부터 줄줄이 망년회 판이 벌어질 것이다. 초자아도 생각하면서 적당히 마시길 권한다.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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