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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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2.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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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함부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모이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그 이야기가 금세 네트워크를 타고 퍼져나가 진위에 상관없이 곤욕을 치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모으는 일은 우주선이 도킹을 하듯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며칠 전 넬슨 만델라가 죽었다. . 더 이상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도, 사람도 사라진 이 치열한 각개전투 시대에 그는 세상을 아우르는 한 줄기 빛이었다. 각국 정상들은 앞 다투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날아갔고, 잠시 분쟁을 잊은 듯 악수를 나누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인종과 피부색을 막론한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만델라가 흑인 최초로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어 폐지를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는 여전하고 흑인들의 척박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개탄하는 이들도 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선한 의지를 가진 여럿은 여전히 소중한 힘이 돼 세상을 바꾼다. 만델라의 죽음 앞에서 흥에 겨운 춤사위를 멈추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만델라가 말한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 화해와 평등이 함께 춤추는 무지개나라’를 본 것 같았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아는 이를 많이 만난다. 터 잡고 산 세월 덕분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반가운 이를 만나면 미소부터 나온다. 소설가의 특강을 들으러 간 교육청에서도 여지없이 아는 이를 만났다. 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독서회 문집을 엮는 일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일이 금세 떠올랐다.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서였을까, 소설가의 강연은 다른 때보다 알찼다.

환승을 위해 내린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소설을 쓰는 김 선생이다. 단아한 여인과 함께였다. 선생은 나를 소설 쓰는 아무개라고 소개한다. 더불어 선생은 내게 여인을 소개한다. 선생과 악수를 나누고 소개받은 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과 내가 몇 마디를 주고받는 동안 여인은 조금 멀찍이 물러섰다. 내가 탈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서둘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러 오는 짧은 시간, 선생의 눈길이 등에 꽂힌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빈자리에 앉아 김 선생과의 만남을, 도킹을 돌이켰다. 그저 신기한 만남이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다가 아차 했다. 왜 나는 그저 버스를 타고 오기 급급했을까. 바쁜 일도 없고 버스는 기다리면 또 올 텐데 왜 선생에게 가까운 곳에서 차라도 한 잔 하자고 권하질 못했을까. 왜 선생을 먼저 보내드리지 않고 등을 보이며 먼저 왔을까. 선생보다 우리 집이 가까운 곳이었는데 말이다.

조금 늦은 저녁시간이었고, 날도 꽤 쌀쌀하고 추웠다는 따위의 여러 가지 까닭을 생각했지만 순전히 이것은 여유가 없는 내 성격 탓이었다.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상황을 조율하지 못하는 평소의 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탓이었다. 내 등에 묻은 조급함을 선생에게 들킨 것만 같아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이 편치 않았다.

수많은 이들을 한군데로 모은 넬슨 만델라의 힘은 강철 같은 군대도, 억세고 거센 정책도, 국민 위에 군림하는 힘센 정치가도 아닌 스무 해가 넘는 감옥생활에도 천진하게 이를 드러내 웃는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때문이리라.

아울러 특강을 한 작가가 말한 ‘문화’는 멀지 않다.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서 누구를 마주치더라도 상황에 맞게, 편안하고 유연하게 모든 이를 대하는 날은 내게 언제쯤 올까. 그날이 정말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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