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채명신 장군을 추억하며
‘故 채명신 장군을 추억하며
  • 울산제일일보 기자
  • 승인 2013.11.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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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처음 만난 건 1972년 겨울 이맘때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할 때 공보관으로 있었던 김기원 중령이 ‘일을 좀 도와주라’고 해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으로 가 그를 처음 만났다. 거실에서 본 장군의 모습은 깡마른 체구에 가무잡잡한 얼굴로 60년대 중반 ‘대한 늬우스 월남소식’에서 본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마가 유난히 반지르르하게 윤이 낫고 눈빛이 맑았다는 생각이 난다.

60년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은 대장승진 첫 번째 코스였다. 채명신 사령관 후임인 이세호 장군이 주월 사령관을 마친 뒤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것만 봐도 익히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채 장군이 귀국해 중장으로 예편 된 것을 두고 당시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채 장군을 비롯한 군 내부의 결속력이 당시 유신체제를 기획하던 사람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나 돌았다.

당시 월남에 파병되는 장교들은 2년 복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다 보니 65년부터 69년까지 4년 이상 동안 채 장군과 함께 월남전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장교들이 전(全) 군에 골고루 깔려 있었다. 또 이들은 숱한 전투를 치르며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 든 터라 귀국 후에도 끈끈한 전우애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전투 중 미군과 공조 작전을 자주 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군 고위 장교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제반 조건들은 국내 집권세력들이 봤을 때 유신체제를 추진하는 데 적지 않은 장애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필자는 후암동 장군 자택에서 장군이 스웨덴 대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월남에서 함께 근무했던 미군 고위 장교들에게 영문으로 인사장을 만들어 전달하는 일을 주로 했다. 미군 영관급 장교와 장성들은 인사장을 전하러 간 필자를 깍듯이 대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채 장군에게 안부 전해 달라. 절대 잊지 않는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그들의 말투에 뭔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을 마무리 지을 무렵 장군 내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그날 저녁 그 예비역 장성이 했던 말을 필자는 살면서 마음이 혼탁해 질 때 마다 삶을 다스리는 거울로 삼았다. “자네, 혹시 우리 집에 들어오다 몸이 성치 않은 애를 본적 없나. 내 자식 놈이야. 내 잘못으로 생긴 결과지.” 그러고 보니 일을 시작한 지 일 주일 쯤 됐을 때 그 집 뜰을 지나다가 어린아이 네댓 명이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 중 한 명이 한 쪽 팔을 못 쓰고 다른 손으로 공기 돌을 던져 올리고 있었다. 나이 먹은 노인도 아니고 어린애 였기 때문에 몹시 측은하고 마음이 찡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북 황해도가 고향인 장군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혼란기에는 태백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 중에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공산군을 격멸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1960년대 월남전 한국군 사령관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전우를 잃었겠는가. 또 비록 적이긴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됐겠는가. 그는 이 모든 결과가 자식에게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장군이 생전에 “나를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어제 노(老) 장군은 일반 사병들이 묻혀 있는 곳에 몸을 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다른 장군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고인이 사병 묘역에 묻히고 싶어 한 이유는 그런 ‘본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명령 하에 전투를 치르다 쓰러진 장병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한순간의 잘잘못은 언젠가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게.” 1972년 12월 어느 겨울 저녁, 그는 20대 젊은이에게 이런 조언을 해 줬었다. 장군의 명복을 빈다.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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