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파가 이뤄낸 춤사위
세월의 풍파가 이뤄낸 춤사위
  • 정종식 기자
  • 승인 2013.11.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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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 무용연구소 소장
‘울산=무용 불모지’ 벽을 깨는 50대 꾼들의 속이 꽉 찬 공연

 
그는 시를 사랑한다. 한 때 서양화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춤을 춘다. 그래서인지 내면이 강해 보인다. 강하다는 것은 혼자일 때 자주 터득하는 미덕이다. 우리 고전 무용을 택하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홀로 출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연하게 설정했던 추측이 대충 들어맞은 셈이다. “서양 무용은 대개 남녀 한 쌍의 춤입니다. 또 골반을 중심으로 하는 몸동작이 주요 요소죠” 반면 우리 고전 무용은 손끝과 버선코를 튕기며 점, 선을 이어 원(圓)으로 완성되는 ‘절제의 미학’이라고 했다. 다음달 21일 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될 ‘한국 예인열전’ 의 출연자이자 기획자인 이영아(53·사진)씨의 설명이다.

“이영아 춤의 특징은 무엇인가” 를 묻자 자연처럼 사람 마음속에 스며드는 춤을 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춤꾼생활 시작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춤을 추는 건 어떤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소자연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속에서 우러날 때 추면 되죠.” 소녀시절 시를 좋아했고 미술에 흠뻑 빠지기도 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춤판으로 뛰어 들어 그곳에 살고 있단다. 그래서 요즘 일부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맹목적으로 춤을 가르치는 건 절대 반대다. 마음에서 우러나 춤을 춰야 진정한 ‘춤꾼’이 되지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모방하면 ‘춤쟁이’가 된다고 했다.

다음달 21일 개최될 ‘한국 예인 열전’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가자 지금까지 차분했던 그의 톤(tone)이 갑자기 높아졌다. 우선 ‘울산이 만드는’이란 말을 ‘한국 예인열전’ 앞에 꼭 넣어 달라고 했다. “다른 곳에선 울산 무용을 크게 보지 않아요. 불모지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십 년간 울산에서 춤을 춘 사람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다음 달 공연 일체를 자(自)부담으로 꾸릴 것이라고 한다. “울산에도 그들 못지않은 50대 춤꾼들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이 쯤 되면 다음 달 공연은 서울 5명, 울산 5명, 호남 3명이 출연해 벌이는 한판 자존심 대결 춤판이 될 개연성이 크다. 그가 일체의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면서까지 다음달 ‘한국 예인열전’을 울산에서 치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울산 문화·예술계가 쌓아두고 있는 ‘차단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다. “특히 울산 춤 세계는 너무 닫혀 있습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울산에도 훌륭한 인재가 있음을 외부에 보여 주기도 하고요.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음 달 무대의 시작은 ‘남도 소리’를 통해 외빈을 환영하는 것으로 구성한다. 다음은 반구대 암각화와 태화강을 배경으로 ‘울산 소리’가, 3막에는 옹기 가마 속에서 독춤을 춘다. 끝으로 깃발을 들고 모두가 동해로 달려가며 태화강에서 시작돼 동해로, 대양으로 뻗어가는 울산의 기상을 표현한다.

이 무대의 특이점은 출연하는 춤꾼 다수가 50대란 사실이다. “한국 무용은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이 있지요. 나는 단연코 이 말을 거부합니다. ‘삭은 김치 맛’을 내는 게 한국 무용의 정수거든요.” 뭔가 맺힌 것이 있는 듯한 말투다. 그런데 말이 이어 질수록 그런 뉘앙스가 더 강하게 풍겼다. “울산에는 춤을 열심히 추지만 이름 못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멋만 든 무용인보다 속 찬 춤꾼들이 더 많아요. 그들이 인정받는 풍토가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 공연을 통해 50대 울산 중견 예술인들의 갈고 닦은 숨은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 50대들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할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 전통무용이 나아갈 바가 뭐냐고 묻자 “전통이란 것은 불변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 때 마다 새로운 것이 더해졌지만 ‘전통’이란 큰 덩어리가 그대로 내려온 것처럼 보이죠. 우리 세대도 시대에 맞는 우리 춤을 창조해 보태야 합니다”고 했다. 그래서 기존의 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모방이지 창조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방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한다. 이 말에 이어 울산에 관한 뭔가를 이야기하려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재차 되묻자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순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이죠. 또 그 시련의 기간 동안 더 강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구요” 라고 했다.

말의 느낌을 정리하건대 울산 춤판에 대해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자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위를 존중하지 않으면 아래로부터 존중받지 못합니다. 춤꾼은 비즈니스와 거리가 멀어야 합니다” -위를 존중해야 한다, 50대 춤꾼들의 기량을 보여 주겠다, 춤꾼은 비즈니스와 거리가 멀어야 한다- 이쯤 되면 50대 중견 춤꾼 이영아가 왜 모든 경비를 들여가며 외지 베테랑 춤꾼들을 불러들여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는지 알만하다.

“춤은 아이를 낳아 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깊이 있게 춥니다. 아이와 춤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인생과 춤은 서로 엮여 있습니다. 어려움과 슬픔을 겪을수록 춤은 더 농현(弄絃)의 경지에 닿습니다.” 인간의 온갖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알아야 제대로 춤을 출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왜 자신의 무용연구소 건물에 ‘섬’이란 글자을 크게 아로새겨 놨는지 알만하다. 울산 춤판 속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외부와 단절된 느낌, 그리고 그 단절이 주는 신비감, 그 신비감을 자긍심으로 삼는 춤꾼 이영아. 다음달 21일 이영아를 비롯한 13명의 예인들이 과연 어떤 무대를 펼칠지 자못 궁금하다. 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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