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욕망’
초겨울의 ‘욕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2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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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동거리며 살아가는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말이다. 더욱이 도시인들은 단조로운 생활에 주눅이 든 듯 말들이 없다. 필자는 단조로운 생각이 들면 과거로 되돌러가는 습관이 있다. 지난 젊은 대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아직도 수십년 전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 같다.

“으음…, 이 커피향기…, 당신의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로 시작하는 어느 TV의 유명한 커피회사 광고카피. 중저음의 국민배우 안성기의 목소리다. 필자와는 같은 대학 같은 학년인 그다. 지금의 광고화면에 비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옛날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다르다고 하면 이마에 쌍주름이 생겼다는 것, 양보조개가 옛날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갔다는 것. 그러나 동그랗게 광채 나는 눈빛은 지금이나 예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 당시 그가 무대에 오른 대학동아리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1947)가 생각난다. 그때부터 그는 주인공 ‘스탠리’역으로 열연했다.

미국 현대극에서 최고의 고전으로 치는 이 연극은, 원래 퓰리처상을 받은 원작자 ‘테네스 윌리엄스’(T. Williams·1911~1983)의 희곡작품이다. 동시에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드’를 일약 스타덤으로 올려놓은 영화(1951)이기도 해 뭇사람들의 과거 향수를 다시 맛보게 한다.

여주인공은, 사라져가는 미국 남부의 문화적 전통을 고수하여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여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잃고 욕망과 과거의 환상 속에서 자기의 은둔처를 찾으려 몸부림친다. 여주인공 ‘블랑쉬’로 분한 ‘비비안리’를 통해 현대인의 좌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 ‘스탠리’로 분한 ‘말론 브란도’는 현대 영화사상 가장 터프하고 세속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섹시한 아이콘을 폭발할 듯한 에너지로 연기하는 것에 대해, 팬들은 이보다 더 잘 할 수 없는 연기라고 극찬한다.

‘욕망’이란, 본능적으로 추구하기도 하고, 분별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다. 만약 바람직한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루어지면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끼고, 그 반대가 되면 오히려 불쾌감,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은 모두 이와 관련돼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 Maslo w·1908~1970)는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고, 욕구의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생리적욕구, 안전욕구, 애정욕구 그리고 존경욕구, 자아실현욕구와 같이 5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욕구는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돼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돼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고 하는 아주 흥미로운 이론이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 Girard·1923~)는 또한, 우리 인간은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욕망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낭만적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욕망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중개자를 ‘세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욕망구조에 편입돼 있으며, 이것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드러나는 ‘소설적 진실’이라 역설한다.

‘욕망’이나 ‘욕구’는 경우에 따라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든 과욕한다는 것은 정말 금물이다. 과욕을 부리면 언젠가 영락없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몇일 전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 어느 선지식은 말씀하셨다. 석가가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세상의 허망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제발 평등하게 배분하면서 살아갔으면 한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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