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탕작전 도당비서 생포 비밀서류 압수
소탕작전 도당비서 생포 비밀서류 압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2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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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집결지 길목지켜 ‘일망타진’ 동부 빨치산에 치명적 손상 입혀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 한국전쟁 발발 58년째가 되는 올해 유월은 월초부터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소수집단이 시작한 이념 싸움은 울산의 산하(山河)에도 피를 뿌렸고 그 때 사라져간 호국 영령들이 지금 천상에서 오열하고 있음이다. 목숨 바쳐 지킨 땅은 자신들을 향해 ‘반 민족자’라 하고 미제 M-1 소총을 들고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미 주의자’라 하는 후손들이 섭섭해서다. 그래도 그들만이 진정한 애국자였고 그들 때문에 오늘이 있음을 하늘과 땅은 알고 있다. 6·25 전쟁 전후로 울산 지역에서 벌어진 빨치산의 민간인 살해, 경찰의 소탕 작전 등 좌우익의 유혈 충돌을 매주 금요일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1952년 음력 11월25일 밤 11시께. 울산군 두서면 내와리 임(任)석순씨의 사랑방에서는 남로당 제4지구당 울산군당의 우명이 좌우되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개죽음 하겠단 말이냐?” 임석순씨가 대들듯이 말했다. “산에 들어가서 여러번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한번 들어 선 길인데 이 길로 죽어야 되겠습니다. 동무들이 원수를 갚아 주겠지요” 침울한 목소리로 최(催)영도씨가 말을 받았다. 최영도. 당시 18세. 남로당 제4지구당 좌익책.

“네 이놈! 이 길로 죽는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너 때문에 고통받고 숨어사는 가족은 어떻게 되느냐? 네가 원래부터 좌익에 물든 것이 아니고 납치돼 간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지금 당장 내려가자. 5일씩이나 설득했는데 다시 산에 간다니 말이나 되느냐?” 임석순씨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최씨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레 산에서 내려 오겠습니다.” 새벽까지 계속된 논쟁은 날이 밝아 올 무렵 최영도씨의 ‘승락’으로 끝이 났다.아침 식사를 마친 임씨는 두서 지서주임 金홍조 경사에게 부인을 급히 보냈다.

이틀후인 11월27일 밤 9시께 임씨와 최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의경 중대장 권(權)경복씨의 안방에서 김홍조 경사를 만났다. 한참 동안 김경사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자네는 지금 자수하거나 전향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경찰의 지시아래 역 공작을 펴기위해 입산했던 사람이란 것을 명심해야 돼” 그로부터 일주일 후 최씨는 경찰특수부대인 독립중대에 편입됐다. 당시 독립중대는 결사대로서 경남도경국장의 지휘아래 있는 각 경찰서 사찰계 직속부대였다.

52년 12월 3일. 독립 중대장 김(金)문근 경사, 사찰주임 서두진 경위, 전향한 최영도씨 3명이 은밀한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최씨의 진술대로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 도둑골에 독립중대를 투입, 정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최씨의 진술에 의해 울산군당 본부가 농소면 동대산에 있다는 사실은 파악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2년 음력 12월 31일 오후 5시께. 부슬부슬 겨울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독립중대원들이 도둑골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해를 마지막 보내는 섣달 그뭄날 인지라 공비들도 긴장을 풀고 헤이해 져 있으리란 점을 역 이용했다. 계곡 입구를 들어가던 중대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일이 생겼다.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인데 길바닥에 발자욱이 나 있었다.

바짝 긴장한 대원들이 몸을 낮추고 산속에 있는 독립가옥 쪽을 바라 보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중대원 중 3명은 재빨리 가옥 뒤 능선으로 뛰어가 사격자세를 취하고 2명은 정면돌파를 시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뒤 이어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겨울산의 정적을 깨뜨렸다. 부엌에서 불을 때던 2명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1명은 뒷산으로 달아 났으나 심한 출혈로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출혈이 심했으나 숨은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울산 본서로 즉각 후송해서 살릴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공비는 경남도당 위원장의 비서였는데 가방속에 중요한 비밀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이날 노획한 비밀서류에서 울산군당 본부의 위치가 동대산 연암탄광 속 지하 땅굴이란 것이 확인됐다.

한편 이 사고로 신불산에 있던 도당 본부와 연락이 두절된 울산군당 위원장 정(鄭)모씨는 자수를 하게 됐고 부하들도 설득해 8명이 전향했다. 나머지 공비들은 체포되거나 사살됨으로써 군당이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날 노획한 비밀서류 덕택에 해방 후 울산경찰 역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53년 음력 1월 12일 오후 4시께 울산 경찰서장 김(金)종신 총경 사무실에 네 사람이 머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김총경 외에 서두진 사찰계장, 독립중대장 김문근 경사, 부중대장 권모씨 등 4명이었다. 비밀서류에 의하면 대규모 무장공비들이 1월 17일 신불산 고지에 집결하도록 돼 있었다. 당시 북으로부터의 지원과 연락이 끊긴 채 울산 주변에서 준동하던 무장공비들은 하나씩 와해 돼 몇개의 지구당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 중 일부가 치술령을 통해 신불산으로 집결하기로 돼 있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이 노획한 비밀서류에 적혀 있었다. 언양, 두동, 두서 및 울산 본서의 경찰병력 2백명을 차출하여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남로당 제4지구당 보급총책 강(姜)우회(공비명 광질이) 휘하의 무장공비 1백20명이 치술령 루트를 통과하는 시간은 1월17일 밤 1시경으로 추정됐다. 기관총 4정과 박격포 2문을 계곡 양쪽에 배치했다. 밤 11시가 되도 쌩쌩거리는 바람소리 뿐 주위는 적막하기만 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 12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그때 자박거리는 발자욱 소리가 바람결에 스치듯 들려왔다.

시커먼 물체 두개가 산길 양쪽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내려오고 있었다. 척후병이었다. 척후병이 통과하고 10분쯤 지났을때 두런거리는 소리와 쇠 금속성이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매복해 있던 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까지는 한무리가 고작해야 30여명 정도인 공비만 봐왔던 터라 도대체 몇명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정도의 병력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그런 시커먼 물체들이 3,40명쯤 통과했다고 여겨 질 무렵 경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특히 이날 배치된 기관총과 박격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곳곳에 작열하는 포탄과 기관총 소리로 치술령 중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살 54명, 제4지구당 동부 불럭책 정(鄭)진근을 비롯해 생포 13명, 노획 총기 76점, 실탄 다수 및 식량·의류 등 5트럭분을 이날 노획햇다.

이 사건은 남로당 제4지구당 남도부 휘하의 동부 사령부가 결정적 타격을 입고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그날의 전공으로 김종신 서장, 사찰계장 서두진 경위, 두서 지서주임 김홍조 경사는 무공훈장을 받았고 권오복 의경 중대장, 최영도씨는 순경으로 특채 됐으며, 임석순씨는 지난 85년 군민의 날에 안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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