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住處는 어디뇨?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네들
安住處는 어디뇨?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네들
  • 김잠출 기자
  • 승인 2013.11.1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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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신문에 비친 울산<2>
▲ 동아일보에 보도된 ‘安住處는 어디뇨?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네들’ 기사.

조선의 농민들에게 1930년대는 일제의 착취와 수탈이 극에 달했던 때였고 이산(離散)의 시기였다. 울산의 농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일제는 만주개척을 위한 대대적인 이민정책을 펼쳤고 울산에서도 많은 농민들이 만주행 이민열차에 올랐다.

가혹한 소작료에 신음하는 것도 모자라 몇 년간 계속된 자연재해를 겪은데다 일제 수탈까지 겹쳤으니 먹고 살기 위한 엑소더스였다. 당시 울산역의 풍경이 어땠는지는 신문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安住處는 어디뇨?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네들’

한동네 40여호가 살길 찾아 만주 유랑, 춘궁은 다가오고 먹을 것 없어-거번에 울산읍 유곡 20여호가 살길 찾아 만주로 간지 얼마되지 않아 또 울산군 상북면 양등리의 일동 40여호가 살길이 막연하야 춘궁기를 앞두고 만주로 지난 3월 18일 길을 떠났다 한다(동아일보 1934.3.24)

울산 농민들이 호계역에서 우울한 봄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동아일보 1936.4.7)

울산 농민들의 만주행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계속됐다. 한꺼번에 5~60명씩 떠나기도 하고 마을 전체가 떠나기도 했다. 기사 제목만 봐도 이별하는 역마다 눈물의 바다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봄을 등진 눈물의 이민열차 황량한 만주벌로(조선중앙일보1936.3.15) 잘 있거라 내 故鄕-언양에서 40명 이민(조선중앙일보 1936.5.3)

농민들은 춘궁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하기도 어려웠다. 고향에 남은 자들은 만주에 간 사람들이 유랑한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남아 있는 자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양의 도토리 채취 풍경을 전하는 신문 기사를 보면 차라리 처절하다.

‘旱災地彦陽地方에 도토리採取者激增-每日入山者가 數千名’

언양지방五개면 一만여호의 五,六활이 년년히 초근목피로 잔명을 이어오든바 금년은 특히 미징유의 대한발로서 만곡의 수확기부터 남부녀대하고 유리군이 매일 수십호씩 속출하고 잇으며 일개월 전부터는 익지도 안흔 도토리라도 채취하야 연명이라도 할가하야 매일 수천명의 입산자로 하여금 산야에는 기관을 이루게 되어서며(1939.09.28 동아일보)

일제의 대륙침략이 가속화 되던 시기. 만주로 떠났던 울산 농민들은 자신들이 탄 부산~만주 봉천행 열차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일제는 그 열차를 ‘빛’과 ‘희망’-‘히까리(光)’와 ‘노조미(望み·희망)’라고 불렀다.

김잠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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