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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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2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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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핵심 쟁점에 대해 곧 잘 ‘공개 토론’을 들고 나 오고 자신있게 도전장을 던진다. 생활 속의 지혜로 어눌하게 대응하는 상대방은 이 들에게 초반부터 제압당하기 마련이다. 자르는 듯 한 강한 어조로 직설법을 이용해 대화, 토론, 대담의 기선을 잡아 버린다. 불리한 입장에 몰렸을 땐 특정단체, 조직이 사용하는 용어를 등장시켜서 그들과의 연관성을 과시하는 기교를 부리기도 한다. ‘떨치고 일어서자’, ‘하나되어 깨부수자’, ‘냉큼 하시오’ 등이 그 한 예다. 특이하고 생소한 어휘를 동원해서 적시에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재간도 있다. 상투적 말투나 용어는 대화, 토론이 길어질수록 ‘식상함’만 야기 시킨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언에 가까운 몰상식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평범’으로 접근해서 ‘논리’로 설득시키는 ‘꾼’들의 전형적 행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논리가 실제와 괴리를 빚을 때 내 뱉은 ‘말의 가벼움’ 때문에 침묵했던 다수로부터 배척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그들은 찬성보다 반대쪽에 머무는 체질이다. 때론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몰입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다수에 대해 반발하는 소수가 유별스럽고 성가신 존재로 비치는 반면에 나름대로의 매력도 지니고 있음을 그 들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이 때 반발의 근거로 역사적 사실, 저항 과정을 전면에 내 세우며 ‘반대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것처럼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물쩡한 다수의 찬성보다 긴박한 소수의 반항이 결속력 응집에 훨씬 유용함도 안다. 그래서 긴박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고 반대 논리도 학습시킨다.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보수, 중도가 단련된 소수의 좌파에게 TV 토론, 대화에서 왕왕 멀리는 것은 바로 ‘논리교육’의 결여 탓이다.

그들은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 산만한 다수는 질서정연한 논리에 약하다는 사실을 활용해 일단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다. 소수의 반대파는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 줄 ‘선도자’를 기호하지만 군중은 옆으로 비켜서서 지켜보는 습성에 젖어 있음도 고려한다. 이런 대중들에게 정면으로 다가가 반감을 사기보다 각개 접촉을 통해 설득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모를 리 없다. 강자에겐 물리적 충돌을 유도해 다수 대중으로부터 동정심을 자아내려고 시도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불리한 소수에겐 상대의 불평, 불만을 경청해 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소수, 약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그들을 향해 면전에서 직설적으로 반박할 방법이 별로 없음을 간파하고 있어서이다. 근자에 와서는 ‘틈사이 끼어들기’의 방편으로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경향도 있다. 주도적 인물 한 두 사람이 부상하는 것 보다 평범한 시민이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장면을 연출하면 상대적 반발 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스스로가 만든 약점 때문에 몰락한다. 그들이 즐겨 쓰는 이분법은 자신들을 침잠시키는 최악의 수단으로 비난받고 있다. 논리적 반대를 펼치게 되면 흑, 백 양자로 구분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적과 동지를 칼로 자르듯이 구별 짓는 경직성은 보통 시민들이 쉽게 수용키 어려운 부분이다. 더구나 적군의 의견은 수렴, 인정치 않고 상대를 배척하거나 궁지로 몰아 부치면 세상에는 그들만 남는다. 자신들이 거부한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고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다.

/ 정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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