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서울대의예과
제13화 서울대의예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24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학년 수석 당당히 입학해

지방학생 서울권 진학 어려워

1940년, 서울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할 때, 당시 제1고등보통학교, 지금의 경기고등학교가 그래도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학교인 것을 알았으면, 동강 선생은 학교를 바꾸어 시험을 보러 갔을 것이다. 소학교 일학년 때 늑막염으로 병을 앓다가 반에서 최하위 성적을 받고 스스로 결심하여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하던 결단력이 있었던 동강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제2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것은 아직 울산의 어린 소학교 학생이어서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었다. 이런 사실은 서울에서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며 서울의 사정을 알게 되고, 당시로서는 일류 학생들만 다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당당히 지원하여 합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동강선생의 부친께서 울산의 면장을 하셨으니 관리가 되는 다른 대학을 택했을 수도 있었는데 어렵다는 의과대학을 택한 것은 그만한 자신감과 학년 수석을 독차지해온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학년 수석(首席)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경복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대학교 의예과로 진로를 정하고 시험을 본 후 당당히 입학하였다. 그 당시 경복, 경기고 졸업생들 대부분이 서울권 대학에 진학했다. 상위권 학생들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고,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연세대와 고려대에 진학했으며, 나머지 하위권 학생들도 웬만한 대학에 입학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방의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는 예는 거의 없을 정도로 지역마다 학생들의 격차가 컸다.’

1945년, 당시는 단기(檀紀)4218년, 일본말이 익숙했던 사람들은 소화(昭和)를 써서 쇼와21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다. 입학 시험도 3월에 치렀고 개학은 4월에 하였다. 해방된 기쁨을 동강 선생은 다음과 회고한다. ‘끝이 안보이던 일제의 탄압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후 일왕의 항복 선언이 방송되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맞았다. 광복의 기쁨이 거리마다 넘쳤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일제의 잔혹함에 치를 떨며 숨죽이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환한 미소가 퍼졌다.’ 광복(光復), 빛 光, 돌아올 復. 식민지 시절은 캄캄한 암흑의 세상이었고, 해방이 된 것은 암흑의 어두움을 걷어낸 환한 날, 즉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날, 빛이 돌아온 것을 말한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대한민국 사회에 충격적 사건들을 일으켰다. 어쩌면 사람들의 당연한 권력쟁취 본능이 나타나는 적절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소설이지만 이병주의 ‘산하(山河)’가 당시의 혼란스러운 나라 안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동강선생의 고학(苦學)이 시작된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