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바쳐 지킨 우리글
외솔정신 널리 퍼졌으면”
“목숨 바쳐 지킨 우리글
외솔정신 널리 퍼졌으면”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3.10.1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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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연 외솔기념관 학예연구사
▲ 외솔기념관을 3년 넘게 돌보고 있는 정성연 학예연구사.

나라와 우리말을 목숨처럼 여기고 지킨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3월 생가 터에서 문을 연 외솔기념관. 이 소중하고 유서 깊은 장소를 3년 3개월 내리 돌보아 온 여성이 있다. 울산중구청 소속 정성연 학예연구사(31).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유물지킴이로 3년을 지냈고, 외솔기념관과 연을 맺은 것은 개관 4개월째인 그 해 7월부터다.

제2회 한글문화예술제 마지막 날(10월 13일) 오전 기념관 1층 회랑에서 처음 대면했다. 아담한 키에 의욕적인 눈매가 무척 인상적이다. 한글문화예술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내용이 더 알차졌고 특히 학술행사가 돋보였을 거예요” 울산시와 중구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울산방송(ubc)이 주관한 올해 행사는 너무 빽빽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내용면에서 빈틈이 안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그 준비과정에 정 학예사도 깊숙이 관여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567돌, 외솔 선생 탄생 119돌을 맞아 진행된 올해 한글문화예술제 행사에는 한글학계의 저명인사들도 적잖이 다녀갔다. 김종택 한글학회 회장, 최홍식 외솔회 이사장은 물론 이성태 울산외솔회 회장과 양명학 한글학회 울산지회장도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 ‘제2회 한글문화예술제’ 기간에 외솔기념관을 찾아 전시물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지난해 제1회 행사는 동천체육관과 외솔기념관 두 곳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올해는 동천체육관보다 접근성이 더 좋은 태화강대공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외솔 선생이 태어난 곳이야 중구 병영이 맞지만 이젠 온 국민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인물이란 점에서다. 기념관을 줄곧 지켜 온 정 학예사는 그동안 겉으로 드러난 변화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평일엔 하루 50∼60명 남짓하던 관람객이 행사기간 중엔 하루 400명을 넘어섰죠. 대부분 외솔 선생님을 잘 모르고 온 분들이었지만 선생께서 한글을 목숨처럼 지킨 애국자였고 중등말본 같은 우리말 책도 참 많이 남기신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다들 놀라워했어요.”

한두 분 얘기를 더 꺼냈다. 생가 앞 글자마당에서 펼쳐진 퍼포먼스 때 굵은 붓으로 ‘한글의 힘’이란 힘찬 필적을 남긴 이상현 서예가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 “그냥 초청인사로 오셨다가 선생님 얘기를 듣고 나선 감격에 겨웠는지 글씨 쓰시던 중에 눈물까지 다 흘리셨어요” 그의 눈물은 이를 지켜보던 이웃주민과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했다.

▲ 힘이 넘쳐나는 이상현 서예가의 휘호 ‘한글의 힘’.

한글교실에서 이름표를 갈아단 ‘제2전시실’로 자리를 옮겼다. 벽의 절반을 차지한 ‘ㄱ’자형 서가는 서적 수백 권으로 빼곡했다. 한글새소식, 우리말큰사전, 세종장헌대왕실록, 겨레말용례사전…. 외솔 선생께서 생전에 손수 집필했거나 즐겨 보았던 한글 관련 서적들이라 했다. 선생의 아들을 비롯한 유족이 기증한 것만 해도 1천권이 넘고 진열된 것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진열을 다 못한 것은 필시 공간이 좁아서이지 싶었다.

정 학예사가 서가 바로 옆 벽면의 ‘가로쓰기’ 풀이 난을 가리켰다. “선생님께서 한글 가로쓰기와 한글 기계화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셨던 걸 보면 참 놀라워요” 사람의 두 눈이 가로로 나란한 만큼 보기에 편리하면서도 빨리 읽어낼 수 있는 글자 배열은 세로쓰기가 아니라 가로쓰기란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였다.

‘한글 기계화’ 이야기는 두 번째로 옮긴 제1전시실에서 실감나게 이어졌다. 영문타자기와 공병우타자기 사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외솔타자기’가 시야에 잡혔다. 선생의 아드님이 운영하던 ‘정음사’에서 만들어낸 한글타자기라 했다. 정 학예사는 선생의 구상이 외솔타자기뿐 아니라 공병우타자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선생님은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이셨죠. 한데 처음엔 뜻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봐요” 이야기인즉슨, 한글 기계화 요청은 해방 직후부터 꾸준히 있었지만 미국적 정서가 강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고집을 꺾지 못해 그 뜻이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대화는 외솔 선생의 인간적 면모 쪽으로 옮겨졌다. 선생은 생전에 원로가수 ‘패티 킴’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고 그녀와 편지글도 몇 차례 주고받았을 거라는 귀띔이었다. 실제로 필자는 외솔 선생 부부가 출연한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패티 킴의 노래와 더불어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장면을 시청한 적이 있었다.

정 학예사는 그 이야기라면 이성태 울산외솔회 회장(현 남목초등학교 교장)에게 한 번 물어볼 것을 권했다. 전화로 만난 이 회장은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편지글을 입수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유족과 패티 김 모두에게서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와 끝내 구할 수 없었다는 증언이었다. 김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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