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름답다고 했는가? 노인은 자기의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84일째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인이 드디어 고기를 낚았다. 거대한 ‘청새치’놈이다. 이 청새치라는 놈은, 창 모양의 주둥이가 긴 것이 특징인데 낚시에 한번 걸리면 무서울 정도로 반항하는 폭발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노인은 앞으로 상어 떼 때문에 첩첩산중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으며 이틀 밤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래도 그는 상어 떼에 다 뜯겨버린 ‘뼈다귀 청새치’를 해변가로 끌고 온다. 외견상 앙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면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는 어부의 강인한 의지, 희망 그리고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렬히 보여주고 있다.
잠깐 화제를 바꾸어 본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말, 우리의 ‘한글’에 대한 이야기다. 한글의 ‘한’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이고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이며, 또한 글 가운데 바른 글, 모난데 없이 둥근 글이라는 훌륭한 뜻이 내재돼 있다니 놀랍다.
이러한 ‘글’의 뜻과 좀 다르지만, 우리가 매일 말하는 ‘말’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리 쉽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로 대답하려면 언어학사전을 열어보면 간단하다. ‘말’이란 ‘어형’(語形)과 ‘어의’(語義)로 구성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어형은 ‘문자나 음성’을, 어의는 ‘의미’를 말한다. 좀 폭을 넓혀 ‘인생’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의미’란 우리의 삶에서 교만함이나 편견을 갖지 말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말일 것이다. ‘말’을 정의내릴 때, 어형보다 어의가 중요하다는 설명이, 모든 사물을 겉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본질을 똑바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명한 그림 이야기로 설명을 보충하자. 아메리카 대륙의 바로 아래쪽에는 섬들이 많이 있다. 그 곳에 ‘푸에르토리코’라는 나라가 있다. 지금은 미국의 자치령으로 돼 있지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로 400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했다. 이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 정면에 눈에 띄는 그림 한 점이 있다. ‘19금’으로 보호해야 할 그림이, 이곳에 전시돼 모든 갤러리들을 깜작 놀라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오라기 하나만 걸친 발가벗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빨고 있으니 말이다. ‘에로’그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젊은 여자는 딸이고 노인은 독립투사인 아버지다. 거의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을 보기 위해, 감옥소로 딸이 직접 찾아간 것이다. 숨을 헐떡거리는 아버지에게 무엇이 부끄러운가! 공교롭게도 해산한지 얼마 안 된 딸이라 그야말로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다. 악랄한 독재정권은 이 독립투사를 어떻게 하면 조용히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굶겨 죽이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 광경을 본 이후 그들은 감동을 받았는지, 노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Cimon & Pero·1630)이라는 그림이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세상만사를, 보이는 것 그대로 판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 내재하는 본질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말이다. 편견이나 아집에 빠지지 말고 본바탕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이 아닌가?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