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창
세상을 보는 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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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복합아파트 모델하우스를 구경한 적이 있다. 아파트 실내는 전면이 통 유리창으로 돼있었다. 로얄 층에다 시야가 탁 트여서인지 필자의 눈길도 한 눈에 사로잡았다. 분양사무실 직원은 현관문을 나란히 하고 있는 다른 평형대를 보여주었다. 두 집은 같은 방향이지만 평수 따라 전망이 달랐다. 앞서 본 중형평수는 병원이 훤히 내려다보였고 뒤에 둘러 본 대형평수는 지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근린공원의 녹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렇듯 한 방향을 보고 있어도 창을 어디로 내느냐에 따라 탐탁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거나 녹음이 짙은 숲이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법은 지도였다고 한다. 탐험가들과 지도제작자들은 천문도인 하늘 길과 해도인 바닷길을 누비며 세상의 모습을 확인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을 것이다. 전시장에 걸린 고지도는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과 상상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위쪽에는 각기 다른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거나 마젤란함대가 빅토리아 호를 타고 항해를 하던 모습과, 중국과 일본을 기독교 화하려는 서구열강의 야심도 그려져 있다.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해 놓은 지도는 미지의 세계를 그들이 눈으로 보고 발로 내딛은 증거이자 결과물일 테다. 고지도를 보면서 시대나 개인의 상황, 더 나아가 국력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어릴 적 필자가 보던 세상의 창은 신문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조간신문이 아니라 석간신문이 대세였다. 학교를 파하고 저녁을 먹을 무렵이면 대문 앞에는 으레 신문이 놓여있었다. 저녁밥상을 앞에 놓고 밥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뒤로하고 신문에서 나는 알싸한 잉크냄새를 맡으며 내가 겪지 못한 세상의 모습에 눈을 붙박고 있던 기억이 아련하다. 신문 위 칸의 구석자리엔 답답한 현실에 세상을 조롱하거나 풍자하는 고바우영감 같은 연재만화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고 유명작가의 연재소설은 신문 부수를 늘려주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가정주부가 춤바람이 나거나 도박으로 영창신세를 지는 사건들이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거나 저명한 교수나 학자가 간첩으로 붙잡혀서 포승줄에 묶인 사진을 흔하게 접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범죄로 몰고 가거나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지식인들이 간첩이 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잠잠해지긴 했지만 현직 검찰총장의 혼외자식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어떤 신문은 총장의 추문에 가까운 사생활과 도덕성을 파헤치는가 하면 또 다른 신문은 특정언론과 정부가 짜고 검찰 길들이기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한 가지 사건을 두고 본질은 외면한 채 보는 시각은 전혀 다르다. 마치 얼마 전 필자가 본 주상복합아파트의 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쪽에선 이 사건이 당사자나 국민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다른 측면으론 유능한 고위공직자를 정쟁의 희생물로 삼았다는 양비론이 팽팽하다. 어찌 보면 이러한 언론의 다양한 시각은 과도한 정보제공으로 피로감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론 국민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본다.

볕이 눈부신 어느 날, 태풍이 지나간 탓인지 유리창이 부옇게 얼룩이 져 있다. 마음먹은 김에 유리창을 닦으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맞은 편 건물의 지저분한 옥상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이사를 가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노릇, 깨끗한 바깥풍경을 보려면 유리창이라도 닦아야지. 맑고 투명한 창문 하나정도는 여닫을 수 있어야 하수상한 시절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따라 말간 유리창 너머로 하늘이 더 높다.

<박종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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