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화강을 걸으며
다시 태화강을 걸으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10 2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형, 다시 태화강을 걷고 싶습니다. 오래 전 같이 걸었던 그 길은 ‘태화강 100리 길’입니다.

태화강은 가지산·백운산·고헌산 등에서 시작된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돼 울산의 서쪽에서 동으로 흐릅니다. 상북 두서 언양 범서의 산과 계곡, 마을과 들판을 적시며 울산의 도심을 가로질러 100리 넘게 달려 울산만에 들어가죠.

태화강은 그냥 흐르기만 하지 않습니다. 탑골샘에서 내와, 복안, 대곡천을 지나면서 댐을 만나 쉬기도 하고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감상합니다. 천전리에선 화랑과 공룡을 만나고 이루지 못해 더 슬픈 왕실의 로맨스를 읽기도 하고요. 반구대의 벼룻길을 지나면서 바위에 고래와 범을 새기고 선바위를 거쳐 굴화와 삼호, 십리대밭과 태화루를 바라보는 여유도 부립니다. 그러면서 새와 물고기를 살리고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고마운 강이죠.

기억하시나요, 문수산에 진달래 필 때쯤 태화강에 올라오던 은어떼와 가지산 단풍잎이 물들면 그 색깔에 맞춘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던 풍경들.

훼손된 배리끝에는 모심기 노래의 원형인 누이의 슬픈 사연이 남아 있고 삼호에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망국의 한탄이 들리는 듯 합니다.

십리대밭 내오산 바위에 새겨진 자라그림은 불로장생의 꿈과 삼신사상이, 장춘오는 봄을 그리는 선비의 꿈이 묻어 있고 태화루 아래 용금소의 호국룡은 사라진 지 오랩니다.

울산교 아래에선 없어진 고구마 섬을 떠올리고 임란전쟁의 아픈 역사와 추전선생의 노블리스오블리제를 함께 가르쳐 준 학성공원에서 이수삼산을 바라보며 요산대의 뜻을 새깁니다.

명촌에 이르니 강물은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하나가 돼 바다로 들어가면서 여정을 끝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길이 있는 법. 태화강에도 많은 길이 있습니다. 둑길을 따라가다 오솔길에 들고 벼락길이나 벼룻길을 지나기도 합니다. 너덜길 벼룻길 고샅길 방천길 꼬부랑길 두멧길도 만나고 물길이 있고 숲길이 있고 산사 가는 길과 마을길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나 저 나름의 매력이 있고 어디는 풍경 그 자체가 사람을 위안하기도 합니다. 정적과 맞닥뜨리는 길이 있고 사람과 단절돼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길도 있고요. 모두 태화강 100리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푹 빠질만한 길, 끌려서 걷고 싶은 길, 걸을만한 길은 흔치 않은 법.

처음 길을 나서며 가졌던 마음을 한 두시간 동안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길, 걸을수록 좋은 느낌이 생기는 길, 도시와 소음과 멀어지고 단절되어도 외로움을 타지 않는 길, 혼자 걸으며 나를 돌아보매 사무사(思無邪)를 되새길 수 있는 길이면 좋겠습니다.

정취를 물씬 느끼며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 무심코 지나치다가 되돌아 가 걷고 싶은 길, 걸어서 재미난 길… 그런 길을 걷고 싶습니다.

태화강의 발원지인 탑골샘에서 큰 바다로 들어가는 명촌까지 48㎞의 ‘태화강 100리 길’이 울산의 19번째 ‘길’이 됐습니다. 이 길을 다시 걸었으면 합니다. 수많은 산과 들이 있어 더 푸르른 태화강의 100리 길.

아, 이 길엔 한가지 부족한게 있습니다. 길마다 있는 강마을의 독특한 맛 길이 있을텐데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강과 길은 있는데 강 내음과 함께 ‘걸으면서 맛 보는’ 명소가 없으니 태화강 마을마다의 향토음식이 더욱 그립기만 합니다.

<김잠출 국장/선임기자>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