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네 생각
내 생각, 네 생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0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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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하지만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를 보면서 결실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폭염에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도 “여름이 더워야 과일도 더 맛있게 영근다”며 기꺼워들 한다.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힌 사람들의 실루엣도 가을에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집집마다 남 모르는 사정들은 조금씩 있겠지만, 우리 집안도 꽤나 특이한 내력이 있다. 내리 딸만 넷을 낳은 필자의 엄마가 3대 독자인 아들을 낳은 것은 맏딸을 결혼시킨 후였다. 천금보다 귀한 외아들은 맏이와는 무려 스무세살이나 차이가 났다. 아들 낳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얻은 뜻밖의 늦둥이는 조용한 집안에 큰 웃음을 선사했다.

동생은 무럭무럭 잘 자라 적령기를 맞아 결혼을 하고,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잘살아가고 있다. 손 위 시누이가 넷이나 되지만 워낙 나이 차이가 커 필자의 눈에는 올케가 하는 짓이 모조리 귀엽게만 보인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딸 또래의 올케를 보면 마치 딸을 대하듯 배려부터 하게 된다.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면 열일 제쳐두고 어른으로서의 길잡이 노릇에 시누이들이 두 팔을 걷어 부친다. 그런 손위 시누이들이 당연히 고마운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그건 우리마음이고 정작 올케 마음은 어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토끼 같은 조카를 둘이나 낳았지만, 우리 눈에는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올케는 요즘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수더분하고 착한 성품을 가졌다. 무슨 말이든 일단 수긍하는 태도가 예쁘다. 비슷한 나이의 딸을 떠올려 보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건만 기특한 부분이 더 많다.

그런 사람도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는 모양이다. 그토록 수더분한 올케지만 서울깍쟁이 못잖은 면모를 드러낼 때가 더러 있다. 저울에 단 듯 정확한 음식 장만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부분마저도 그저 신통하게만 여겨졌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불편한 심사를 불러일으킨다. 여자들이 부엌에서 상을 차리다 보면 음식이 남는 경우가 많다. 한데 참 신기하게도 올케의 상차림은 언제나 2%부족하다. 그렇게 딱 맞게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것이다.

늘 습관처럼 음식을 많이 장만하는 큰손(?)을 가진 필자로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매번 너무나 정확한 음식분량은 수수하게 여겨지던 올케 이미지를 적잖이 실추시킨다. 더구나 엄마를 모시고 동생 집에 갈 때는 더욱 신경이 쓰인다. 좀 넉넉하게 장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음식은 인심이다. 조금 맛이 없어도, 조금 낭비가 되는 것 같아도, 그래도 뭔가 풍성하고 넉넉한 밥상이 인간적이다. 지금은 옛날처럼 먹 거리에 연연해하는 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모이는 일에 넉넉한 음식 장만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음식은 바로 자기 집에 오는 손님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느끼는 포만감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포만감은 더욱 중요하다. 외식문화가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세태에 이런 생각차제가 너무 사치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다들 너무나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세상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분주할수록 수수하고 편안한 그런 밥상 문화가 진실로 그립기만 하다.

설거지를 끝내고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보니 언제 떠올랐는지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 있다. 아무 사심 없이 명징하기 짝이 없는 보름달을 향해 나도 모르게 마음을 모은다. 부디 모든 사람들이 둥근 달만큼 넉넉함이 느껴지는 인정스런 삶을 살았으면 한다. 인정이 가득한 밥상으로 서로의 가슴을 채웠으면 한다.

빙긋 웃음을 띠는 달님의 마음을 나는 알 수가 없다. 필자의 생각이 옳다고 웃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가 없다. 서늘한 바람만이 소매 끝을 파고든다. <전해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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