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얼 담긴 ‘자연빛 재현’ 열성”
“선조 얼 담긴 ‘자연빛 재현’ 열성”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3.10.0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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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호 태화루 단청 책임장인
▲ 손질이 끝난 단청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양용호 단청장.

태화루 단청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월천(月泉) 양용호 단청장(丹靑匠·서울시 무형문화재 31호·‘단청연구소 월천’ 대표). 호적과 달리 갑자년 생이니 올해로 만 65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엔 40년 외길 인생의 주름살이 숨어 있다. 지난 주말, 흙먼지 푸석한 작업 현장에서 대면한 선생의 첫인상은 영락없이 ‘푸근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다. 대화에 앞서 따끈한 인스턴트커피부터 한 잔 건넨다. 커피 향엔 진한 인간미도 물씬 묻어난다.

누각 건물 바깥쪽의 단청 작업은 ‘창방’ 부분만 빼고 대부분 끝냈고 지금은 안쪽 ‘대량(대들보)’에 색깔 입히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번 역사엔 ‘단청연구소 월천’의 일꾼 9명이 함께 매달리고 있다. 밑그림과 작업지시는 모두 선생의 손과 머리에서 나온다. 오케스트라로 치면 지휘자 격이다.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모두 가정이 있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락을 같이하는 분들이지요” 선생은 이분들이 ‘단청의 달인’이전에 일당 벌이를 하는 ‘생활의 달인’임을 애써 강조한다. 결코 편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라는 말로도 들린다.

선생은 결혼생활 25년에 이사를 25차례나 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나 얻기 힘든 ‘단청장’의 자부심이야 대단하겠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겠는가. 거기에다 언제나 ‘떠돌이 신세’니 가족들에겐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집에 머무는 날수를 일 년 중 한 달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식이 어릴 때 낯가림하며 울어대는 모습,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인 홍춘희 여사(63)도 ‘문화재 수리기능자 단청 제330호’로 지정받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뿐만아니라 동생 영승씨는 ‘문화재 수리기능자 화공 제579호’, 또 다른 동생 용선씨는 ‘문화재 수리기능자 단청 제314호’다. 일가가 온통 문화재 기능 보유자다. “식당을 하다보면 며느리와 자식까지 매달리는 모양새지요” 일가의 동참이 호구지책 때문이란 이야기다.

▲ 외부 단청작업이 끝나면서 드러난 태화루의 아름다운 자태.

선생이 단청 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73년경이지만 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고향인 전남 영광의 지역신문(영광신문)의 그 해 3월 19일자 기사가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전한다. “법성 신장리 부귀동 마을에 잔치가 열렸다. 지난 14일 이 동네 출신인 서울 거주 양용호(56세)씨가 국가 무형문화재 단청장 31호로 지정돼 이를 축하하고 환영하는 동네 큰잔치가 열린 것이다. ”

이 신문은 선생의 이력도 같이 소개한다. “양용호 선생은 단청문화와 한국화의 대가인 이인호 선생의 문하에서 단청의 화려한 색상과 섬세한 문양 등 단청문화를 공부했고,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인 김일섭 스님과 제자인 박준주 선생으로부터 불상과 목재의 수지 처리 및 고색 단청 등을 전수받는 등 세 분의 선생으로부터 전통문화의 이해와 단청인으로서의 예와 장인정신을 사사받았다.”

선생은 구리시에 차렸던 연구실 겸 사무실을 작년 초에 서울 인사동으로 옮겼다. 한동안 구리에 터를 잡았던 것도 하마 같은 유지비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은 서울 사무실을 다시 연희동으로 옮기는 중이다. 규모는 작지만 이름은 가칭 ‘문화재 전수 교육관’으로 붙여 놨다.

그런저런 사연의 연구실을 지금껏 문하생 열댓 명이 거쳐 갔다. 그 중엔 ‘오너’나 공무원이 된 이도 있고 석·박사도 2명이나 된다.

선생은 그런 결실이 늘 가슴 뿌듯하다. 자신이 단청에 입문하던 시절엔 기능 익히는 방법이 구전(口傳), 수전(手傳)밖에 없었고 체계적 학문적 접근은 숫제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그 상상 밖의 일들을 문하생들이 거뜬히 해냈으니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그래도 선생은 아직까지 ‘감’으로 하는 작업을 고집한다. “고려청자의 장인들 보세요. 하나같이 감으로 가마 불을 지폈지만 훌륭한 작품들 많이 내지 않던가요? 요즘이야 가스불로 온도까지 맞춰 가며 작업하는 세상이 됐지만….”

태화루 단청은 고려시대의 흐름을 본보기로 삼았다. 선생이 그 이유를 풀어 준다. “태화루가 고려조 누각 양식을 본받았기에 단청도 보조를 맞추기로 한 거지요. 한데 고려조 단청으로 남아 있는 곳이라곤 충북과 경기도 용인 지역 정도여서 고심 좀 했습니다” 선생은 궁리 끝에 고려조 양식에 가까운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북한의 심원사 보광전 양식을 두루 참고했다고 귀띔한다.

태화루 단청이 문외한들 눈엔 무척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선생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다. 최근 단청의 추세는 화사한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혼란스러울 정도라는 것. “상대(上代=고려조를 지칭) 작품에선 은은하면서도 무게감과 함께 장중한 기품을 느낄 수 있지요” 태화루 단청 작업을 ‘상대’의 분위기를 그르치지 않게 신경 써서 하고 있다는 얘기다.

선생은 일감의 특성상 사찰을 가까이 한다. 단청 일로 다녀온 전국의 사찰만 400곳이 넘는다. 서울 조계사, 속리산 법주사, 하동 쌍계사 대웅전과 설악산 백담사 교육관의 단청도 죄다 선생의 손길을 거쳤다. 최근엔 태화루 일을 보고 있는 중인데도 법주사로부터 내방 요청을 받았다. 지난 주말엔 조계사 총무원의 부름을 받고 ‘불교미술대전’ 심사위원 일도 맡아야 했다. 그러나 태화루 단청만큼은 회한 없이 매듭지을 참이다.

누각을 받치는 배흘림기둥의 방염처리가 끝나는 대로 기둥 단청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 다음은 누각 바로 옆 동쪽에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대문채’의 단청 작업이 남아 있다. 누각의 단청 마감은 10월 하순, 대문채의 단청 마감은 11월 말로 잡고 있다.

단청(丹靑)을 ‘벌거벗은 몸에 옷을 입히는 일’ 혹은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월천 선생은 그런 보람에 산다. “남들이 손댈 수 없는 일을 감히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 공들인 작품이 10년이고 20년이고 오래 남아있을 것이란 기대감…. 그런 보람들이 다시 일할 용기를 샘솟게 하지요” 선생은 자신의 작품이 값어치를 제대로 지니고 있는지 다시 둘러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장인(匠人)정신을 한 번도 잊거나 버린 적이 없다.

선생은 약 3년 전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최첨단 칠 기술이 발달했지만 전통 단청은 붓으로 칠해야 합니다. 정교하고 선명한 전통 단청에는 우리 선조들의 얼과 기법이 담겨 있습니다. 승려들과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계승되던 우리 단청의 전통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김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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