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8.1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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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7도를 웃돈다. 국정원사건이니 장외투쟁 등으로 시끌시끌하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제발 평범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오! 날씨가 너무 더우니 이런 것들을 잠깐 잊어버리고 쉬었으면 한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쉼’이다. 일을 하다가도 잠깐 쉼은 너무 좋다. 더욱이 일 하나를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다음 날의 쉼이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쉼이든 휴가든 방학이든 이것은 재생산의 좋은 시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주 오랜만에 농수산물시장의 과일가게에 들렀다. 벌써 올 풋사과가 모퉁이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져보고 먹어보니 그때 한여름 방학의 그 ‘사과’맛이다. 그 싱그런 사과를 한입 맛보고 있노라니 필자의 어릴 때 ‘잃어버린 시간’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마치 프랑스의 소설가 M.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으며 기억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1909년 집필을 시작하여 1922년 탈고한다. 장장 14년의 세월을 골방에 틀어박혀 7부작으로 완성한 대하소설이다. 처음 제1부에는 열 살배기 주인공 프루스트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 점철된다. 매년 부모와 함께 지낸 여름휴가의 기억들이 실타래 같이 풀어지는 것이다.

이 소설을 두고, 20세기 신(新)심리주의 문학의 최고걸작이라고 평하지 않던가? 시공을 뛰어넘어 자기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기법을 통해 잘 그린 작품이라 경외심이 더 간다.

아니 필자의 유년기에 빗대어 보면, 너무나 흡사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리에 콩브레’라는 소설의 장소는 필자의 어릴 때 외갓집 과수원, 사랑받는 외할머니 ‘비필트’는 외할머니, 고집 센 하녀 ‘푸랑수아즈’는 외숙모, ‘서양 산사나무’는 과수원의 탱자나무 등 ….

그럼 프루스트가 한 것처럼 필자의 어릴 때 시간을 한번 떠올려 보자.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꼬마는, 대구의 앞산 밑에 있는 과수원으로 여지없이 향한다. 기억에는 동생들과 함께 간듯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꼬마가 좋아하는 외갓집 사과 과수원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는 114년 사과 역사를 증명하듯 옛적부터 사과밭이 많았다. 아마도 사방이 분지라 비도 적고 일조량이 많아 사과나무가 자라기에 매우 안성맞춤의 기후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외갓집까지는 꽤나 멀고 날씨도 매우 더웠던 것 같다. 칠성동에서 지산 외갓집까지 거리는 아마도 50리(?)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방학을 보내기 위해 큰 가방을 등에 메고 손에는 담봇짐을 들고 걸어간다. 그야말로 유격훈련을 받는 해병대와 다를 바가 있겠나.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은 어떻게 했는지, 걸어가다 목이 말라 물은 어떻게 먹었는지, 지금은 안타깝게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기억에 있다면 지산학교 앞의 느티나무 그늘과 바로 옆의 시원한 샘터. 그 샘터는 두레박으로 한참 퍼 올릴 정도로 깊었고 샘물은 그야말로 얼음같이 찼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꼬마가 찾는 그 ‘유토피아’가 나온다. ‘졸졸졸’ 도랑물 소리가 점점 귓가에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즐겁고 환상적이다. 꼬마가 상상하는 과수원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시에 나오는 무릉도원으로 본다. 그래서 꼬마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다.

초록색 ‘가시’가 많이 난 ‘탱자나무’는 바로 과수원의 담장을 대신한다. 옛날 고댕이(고둥)를 후벼 파먹을 때 쓰던 그 가시가 아닌가. 탱자나무 아래는 도랑물이 맑게 흐르는데 그 위는 그야말로 별천지다. 검정색 긴 날개로 유유히 날아다니는 날씬한 ‘잠자리’하며, 알록달록한 날개를 단 ‘호랑나비’까지 여기저기서 빙빙 날아다닌다. 아니 개구리 놈도 물론 있다. ‘청개구리’인 듯하나 심상치 않다. 배 안쪽이 새빨갛게 보여 선뜻 다가갈 수 없는 놈이다….

그것만인가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꽤 많이 달려있다. 거기에다 원색적으로 들리는 ‘매미소리’는 너무나 청아하고 깨끗하다. 줄기마다 다닥다닥 붙어서 웽웽 울어대는데 꼬마가 가까이 가도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그를 과수원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게다. 맨손으로 매미를 한주먹씩 덥석 쥐어 망태에 담아도 괜찮다. 게다가 밉상스럽게 생긴 살찐 풍뎅이놈들까지 모여들고 있으니…. 매년 하는 꼬마의 곤충채집 숙제는 거의 만점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생명거리는 다 자기 것이니 말이다. 마치 동화세계에 줄줄이 등장하는 녀석들과 다를 바 없다. 꼬마는 너무나 마음 풍성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잠시 잃어버린 어릴 때의 풍요로운 세상을 찾으면서, 이 유례없는 폭염을 피해보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 아닐까?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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