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제10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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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수탈 극심한 후반기에 학창시절

힘없는 나라 울분 ‘반항아’로 풀어내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조선은 멍청한 사람들의 나라’이었다. 그래서 막바지(1940년대 초반)에는 멍청한 조선을 더 쥐어짜고 있었다.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공출로 쥐어짜고, 식민지 국민의 비굴한 정신자세를 일본을 위한 충성심으로 대체시키려고 쥐어짜기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의연(毅然)하게 배를 가르고 자결할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는 충성심을 자랑삼으며 조선인에게도 일본 사람, 하늘이 선택한 민족에게 동화되기를 공개적으로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창씨개명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식민지 착취를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머리 좋고 뜻이 있던 경성 제2고보 학생들은 울분을 속으로 삭이며, 그래도 조선인 선생님을 통해 민족적 긍지를 키우고 있었다.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들 역시 일본의 우수한 대학졸업자 혹은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일본인이었고, 단 세분만 조선인이었다. 일제의 군국주의에 철저하게 세뇌된 선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 몇 분은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과 피 끓는 사춘기 소년들의 반항을 이해하며 따뜻한 애정으로 대해주셨다.’

‘교칙이 식민지 학생들을 감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제정(制定)되어 있었는데, 반항적 기질로 인해 몇 번이나 정학(停學)에 해당하는 교칙 위반을 했지만 다행이 우수한 성적 덕분에 큰 징계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몇 번의 정학 위기를 넘기며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나를 눈여겨 보아주시던 안호삼선생님의 덕택이었다.

교칙을 어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조선학생들끼리 떼를 지어 다니는 것, 뭉치어 다니는 것이었다. 요즈음 표현으로는 테러 위험분자들의 행동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동강선생은 경성 제2고보 시절의 악동들, 테러 위험분자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강압적인 학교생활과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억눌린 청춘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처럼 학업성적은 좋았으나 행동이 불량하기로 소문난 다섯 악동들과 어울려 학교 뒤쪽에 있던 북악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거나, 맛도 모르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뿐이었다. 이렇게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악동들의 리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 어울려 북악산의 중턱에서 유치한 놀이를 하는 순간조차 가슴의 답답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유 없는 반항심만 더욱 깊어져 중학시절의 내 성적표 한 칸을 차지하는 조행(操行, 학교생활 태도)은 언제나 병(丙, 생활태도가 가장 좋은 점수는 갑(甲), 중간은 을(乙), 나쁜 학생은 (병)이었다.

사실 식민지 시절의 모범생은 친일분자에 가까웠다. 이런 품행은 민족적 울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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